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라예보 사건 (문단 편집) === 암살 당일 ===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[[보스니아-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]]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을 [[1914년]] [[6월 28일]]로 잡은 것이었다. 이 날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치욕인 동시에 영광의 날로 1389년 [[코소보 전투]]에서 패배하여 [[세르비아 왕국(1217년~1346년)|세르비아 왕국]]이 [[오스만 제국]]에 정복당한 날이자 제2차 [[발칸 전쟁]]에서 세르비아 군대가 [[튀르크]]인들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과거의 패배를 갚아준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. 이를 기념하기 위해 '비도브난(성 비투스의 날)'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르비아 사람들은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는 날이다.[* 노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.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중제국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으로 개편해 민족/언어권에 따라 행정권 분할을 위해 헝가리 쪽 인사들과 씨름 중이었기 때문인데 당연히 이 계획은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는 큰 호재였지만 오히려 극단주의자들을 자극하는 역효과 역시 낳고 말았다. 결국 결과가 정말 나쁘기 그지 없었지만 말이다.] '젊은 보스니아'는 이때를 노려 그를 암살하기로 했고 [[검은 손]]이 그들의 공작을 도와주기로 했다.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은 또 '''황태자의 결혼 14주년 기념일이었다.''' 그리고 진정한 함정은 민족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해 오스트리아-헝가리를 민족/언어권에 따라 행정 구역을 분할한 연방국가로 만들려 한, 즉 '''독일계와 황실'''의 기득권도 내놓는 대인배스런 발상을 한 장본인이 바로 이 사건으로 암살당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[* [[알렉산드르 2세]]의 경우처럼 온건파가 오히려 양 극단의 공격을 받기 쉽다.]는 것이다. 아래 항목을 보면 알 법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무한한 자비심(?)을 보이는 등 페르디난트 대공은 굉장히 대인이었다. 1914년 6월 28일 [[프란츠 페르디난트]] 황태자와 태자비 조피는 9시 20분 사라예보 역에 도착했다. 이후 황태자와 조피는 보스니아 총독 [[오스카르 포티오레크]] 육군 [[중장|대장]]과 함께 레오폴드 로이카(Leopold Lojka)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올랐다. 한편 가브릴로 프린치프 등 [[검은 손]] 단원들도 [[권총]]과 [[수류탄]], 그리고 자살용 [[청산가리]]를 챙겨서 각자 자신의 위치에 배치되었다. 이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아내인 조피와 굳이 동행한 것은 프란츠 본인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하였다. 왕족 출신이 아니었던 조피는 엄격한 [[귀천상혼]] 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 황실 내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. 공식석상에서 황태자와 마주할 수도 없었을 정도였다. 프란츠는 이런 아내의 정치적인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서 조피와 함께 참석했던 것이었다.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직함 중에는 '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 총감찰관[* Generalinspektor der gesamten bewaffneten Macht]'도 있는데 이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던 것이다. 참관 날짜가 결혼기념일인 것에는 이 점 또한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